최익규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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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익규는 1934년 함경북도 화대군 출생의 북한 영화 감독이다. 1955년 조선영화촬영소 부감독으로 시작하여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1956년 22세의 나이로 영화촬영소 소장이 되었다. 김정일의 영화 관련 활동에 참여하여 영화 스승으로 불리며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여러 작품을 함께 제작했다. 그는 선전선동부 부장, 문화상을 역임하며 북한의 주요 선전 행사를 담당했으며, 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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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규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최익규 |
출생일 | 1934년 2월 26일 |
출생지 | 함경북도 화대군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직업 | 영화 감독, 정치인, 선전원 |
활동 기간 | 1955년–현재 |
소속 | 조선영화촬영소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최익규 |
한자 | 崔益奎 |
로마자 표기 | Choe Ik-gyu |
문화어 표기 | Ch'oe Ik-kyu |
가명 | |
한글 | 최상근 |
로마자 표기 | Choe Sang-geun |
문화어 표기 | Ch'oe Sang-gŭn |
직함 | |
직함 | 문화상 |
임기 | 2003년–2006년 |
소속 정당 | |
정당 | 조선로동당 |
학력 정보 | |
학력 | 김형직사범대학 학사 (1954년); 만경대혁명학원 |
주요 작품 | |
작품 | "피바다" (1968년) "꽃파는 처녀" (1972년) |
2. 초기 생애 및 개인사
최익규는 1934년 2월 26일 함경북도 화대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1954년 김형직사범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평양노동학원에서 잠시 러시아어 강사로 일했다.[1] 소련에서 유학했으며,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했다.[2]
결혼하여 아들 한 명과 딸 셋을 두었다. 장녀 최일심은 5부작 영화 시리즈 ''내가 본 나라''(1988-)의 각본을 쓰면서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고 있다.[3]
2. 1. 초기 생애
최익규는 1934년 2월 26일 함경북도 화대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1954년 김형직사범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평양노동학원에서 잠시 러시아어 강사로 일했다.[1] 소련에서 유학했으며,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했다.[2]결혼하여 아들 한 명과 딸 셋을 두었다. 장녀 최일심은 5부작 영화 시리즈 ''내가 본 나라''(1988-)의 각본을 쓰면서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고 있다.[3]
2. 2. 개인사
최익규는 1934년 2월 26일 함경북도 화대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1954년 김형직사범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졸업하고,[1][2]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평양노동학원에서 잠시 러시아어 강사로 일했다.[1] 소련에서 유학했으며, 평양의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했다.[3]결혼하여 아들 한 명과 딸 셋을 두었다. 장녀 최일심은 5부작 영화 시리즈 ''내가 본 나라''(1988-)의 각본을 쓰면서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고 있다.[2]
3. 경력
최익규는 영화감독, 정치, 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김정일 사망 전까지 공식 석상에 자주 동행했으며, 북한 밖에서는 최상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00년 조선국립교향악단 고문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3. 1. 영화감독 경력
최익규는 1955년 조선영화촬영소에서 부감독으로 시작하여 독립 감독으로 활동했다. 1956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영화촬영소의 소장이 되었다. 영화 제작은 대부분 독학으로 익혔지만,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예술 분야의 정규 교육 외에도, 특히 스탈린주의 영화 제작 모델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최익규의 획기적인 작품은 1963년 영화 《진달래꽃》이었다.1968년, 김정일이 북한 영화 산업을 장악했다. 김정일은 이 분야에 경험이 부족했기에, 당시 경험이 많았고 "김정일을 제외하면 영화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북한 사람"으로 여겨지던 최익규와 협력했다. 최익규는 김정일의 영화 관련 활동에서 가장 가까운 파트너, 즉 "영화 스승"이 되었다. 최익규가 감독하고 김정일이 제작한 영화들은 "불후의 고전"이자 인민상 수상작으로 알려지며 큰 인기를 얻었다. 최익규와 김정일이 함께 만든 첫 번째 영화는 《피바다》(1968)였고, 같은 해 《오 형제》가 뒤를 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 최익규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영화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 최익규와 김정일은 《꽃파는 처녀》를 발표했다. 이 영화는 최익규의 지위를 김정일의 측근으로 강화하여 영화 외의 선전 행사를 책임지게 했다. 최익규는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최익규는 태양절 기념 행사 및 광복절 열병과 같은 행사를 담당했다. 그는 아리랑 축전으로 발전할 집단체조를 개발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조직을 감독하고 있다. 또한 조선혁명가극과 연극에 예술적 지침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1971년에 《피바다》의 오페라 각색을 연출했다. 최익규와 김정일의 관계는 긴밀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최익규는 여러 편의 영화 제작을 감독했으며, 예를 들어 여러 편으로 구성된 《조선의 별》(1980-1987)이 있다.
3. 2. 정치 경력
1960년대 말, 최익규는 집권 조선로동당의 선전선동부 영화부 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7] 1972년에는 영화 《꽃파는 처녀》를 통해 김정일의 측근으로 자리 잡으며, 영화 외 선전 행사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고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7]최익규는 태양절 기념행사, 광복절 열병 등 주요 행사를 담당했으며, 아리랑 축전으로 발전하는 집단체조를 개발하여 현재까지도 감독하고 있다.[7] 조선혁명가극과 연극에도 예술적 지침을 제공했는데, 1971년에는 《피바다》의 오페라 각색을 연출하기도 했다.[7]
1988년, 최익규는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복귀하여 극장 및 오페라 분야에서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7] 같은 해, 그는 호평받은 민족 가극 ''춘향전'' 제작에 참여했다.[7] 1990년대 초부터는 최상근이라는 필명으로 ''민족과 운명''을 제작, 연출, 시나리오를 모두 담당했다.[7]
최익규는 1993년 선전선동부에서 해임되어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김정일의 신뢰를 받아 건강 문제 치료를 위해 독일 여행을 허가받기도 했다.[7] 그는 총 4번 선전선동부에서 해임되었다.[7]
2003년 9월, 최익규는 문화상에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2006년에 사임했다.[7] 2009년 3월 8일,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73선거구를 대표했다.[7] 같은 해, 선전선동부 부장이 되었으나, 2010년 2월 초 강능수로 교체되었다.[9]
3. 3. 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
최익규는 대한민국의 유명한 영화 감독 겸 배우 부부인 신상옥과 최은희의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1]김정일은 신상옥과 최은희가 녹음한 비밀 녹음 테이프에서, 신상옥을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으로 여긴 최익규의 조언에 따라 그들을 납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2]
몇 년간 헤어진 후,[3] 1983년 3월 6일 신상옥과 최은희가 김정일에 의해 재회했을 때,[4] 최익규가 함께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신상옥과 함께 김정일을 위한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다.[5] 그는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신상옥과 최은희는 김정일과 거의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6]
최익규는 먼저 신상옥, 최은희와 함께 평양에서 모스크바,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로 여행했다.[7] 이 여행의 목적은 신상옥이 김정일을 위해 만들기로 한 첫 번째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8] 최익규는 이 프로젝트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자신도 호평받는 영화 감독이었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온 신상옥을 돌봐야 했다.[9] 신상옥과 최은희는 모두 최익규를 싫어했다.[10] 최익규는 스태프 앞에서 신상옥의 연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11] 신상옥은 최익규의 행동에 대해 김정일에게 보고하겠다고 위협하여 프로젝트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영화는 완성되었고 런던 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었으며, 신상옥은 참석할 예정이었다. 신상옥은 그곳에서 탈출을 고려했지만, 최익규와 수행원들은 경호원들과 함께 미리 런던으로 갔다.
신상옥과 최은희가 빈에서 탈출에 성공한 후, 최익규는 선전선동부에서 좌천되었다. 그는 시골로 보내졌고, 수년간 그의 정확한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3. 4. 김정은 시대
최익규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의 권력 승계가 불확실했던 시기에 이를 뒷받침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10]4. 작품 목록
최익규는 여러 영화와 오페라를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백일홍(1963), 피바다(1968), 5명의 게릴라 형제(1968), 꽃파는 처녀(1972)가 있다.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피바다(1971), 춘향전(1988)이 있다.[5][6]
4. 1. 영화
- 백일홍 (1963)
- 피바다 (1968)[5]
- 5명의 게릴라 형제 (1968)
- 꽃파는 처녀 (1972)
4. 2. 오페라
- 피바다 (1971)[6]
- 춘향전 (1988)
참조
[1]
서적
Vantage Point
https://books.google[...]
Naewoe Press
[2]
웹사이트
Sources: Kim chooses third son as heir
http://koreajoongang[...]
2009-06-02
[3]
웹사이트
'The Country I Saw,' or 'How We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North Korea's Bomb (Almost)'
http://www.38north.o[...]
The US-Korea Institute at Johns Hopkins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
2012-08-30
[4]
서적
North Korean Cinema: A History
https://books.google[...]
McFarland
[5]
서적
Two Lenses on the Korean Ethos: Key Cultural Concepts and Their Appearance in Cinema
https://books.google[...]
McFarland
[6]
서적
Histoire de la Corée: Des origines à nos jours
https://books.google[...]
Tallandier
[7]
간행물
Choe Ik-gyu Named to Key Post of Workers' Party
http://english.yonha[...]
Yonhap News Agency
2009-03-26
[8]
웹사이트
'Ruthless' youngest son to succeed Kim Jong-il
https://www.independ[...]
2009-06-03
[9]
웹사이트
Personnel Shuffles in the first half of 2010
http://www.nkleaders[...]
2010-06-04
[10]
서적
North Korea under Kim Chong-il: Power, Politics, and Prospects for Change: Power, Politics, and Prospects for Change
https://books.google[...]
ABC-CLIO
[11]
서적
Vantage Point
https://books.google[...]
Naewo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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